[공유] 한하운(1920~1975) 네이버 카페 (2025)

하얀마을 2

검색

메뉴

좋은 글 감동 글

앱 열기

한하운 自傳 [나의 슬픈 반생기]1

본문 기타 기능

프로필사진

chskac

채팅

작성일2005.09.20. 23:25

조회 295

나의 슬픈 반생기 / 한하운 저자

고독한 생명

[나의 슬픈 반생기]를 쓰려고 하면서 몇 가지 곤란한 사정에 주저하지 않을수 없었다.

첫째 슬픈 주인공으로서 세상에 등장한다는 것.

또 하찮은 문둥이의 신세타령을 엮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과 또 한 가지는

나의 반생의 역정을 구체적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나는 무관하나

나보다도 가족이나 친척에게 미치는 불행을 생각할 때 파멸에 가까운

현실에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아직도 어떤 가족 중에서 문둥병자가 생긴다면

그 발병자는 물론이고 그 가족까지 당하는 불행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사형선고를 받고 패가망신 하고 동리서 쫓겨나지 않으면 안될 실정에 있는 것이다.

이제 기약 없는 인생과 영 이별을 하고 난 뒤지만 그래도 아직 온갖 슬픈 전락(轉落)

의 생에 애착과 미련이 많아서 오히려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아름답고

한많은 것이라 이것을 엮으려 할 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다.

[인간은 그 청춘의 아름다운 추억에 살아간다고 ㅡ.]

이 말대로 지금 나는 나의 청춘을 회상하는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또 다시 행복해지는 것 같다.

푸른 하늘 구름 너머 나의 청춘을 회상하는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또 다시

행복해 지는 것 같다.

푸른 하늘 구름 너머 함경남도의 부전령(赴戰嶺)산맥과 함관령(咸關嶺)이 맞서는

함주군 동천명 쌍봉리가 나의 출생지이며 선조 대대로 살아온 고향이다.

지금부터 서른 일곱 해 전 봄이 오고 진달래가 피는 음력 삼월 초열흘날

나는 산천초목의 축복을 받으며 고고한 울음을 이 세상에 소리높이 울렸다.

부계(父系)의 가문을 살피면 대대로 선비의 집안으로 과거를 3대나 계속하여

급제한 집이며 함흥지방에서는 떵떵 울리고 권세 좋게 살던 집이다.

아버지는 기미년 독립운동 때 학교 재학 중 만세를 부르다가

퇴학을 당하셨고 나는 바로 이 기미년에 세상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함경남도 굴지의 대부호의 2남 1녀의 막내 귀염딸로 자라나셨다.

어머니는 열 일곱 살 때 아버지는 열 두 살 어린 나이로 말타고 오셨다고

어머니는 옛말 같은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곤 하셨다.

나는 이런 부유한 환경의 2남 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네 살 때부터

양복을 입고(당시 양복을 입는다는 것은 함경도에서 좀 처럼 부유한 집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었다.)

어린 것들 중에서 으스대며 자라났다고 한다.

우리집은 내가 여섯 살 되던해에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함흥으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학교에선 수재로

보통초등학교 때 나는 학교 공부는 내내 우등을 했고 특히 음악과

미술에 남보다 뛰어났었다.

당시 소년당이 함흥에 처음 창설되었다.

대부분 일본 아이들인데 한국 아이들은 각 학교에서 몇 명씩 추천한 극소수였다.

나도 그 중의 하나에 끼게 되었다.

그때의 친구들 중에는 박범집씨나 신옹균씨가 머리에 떠오른다.

박범집씨나 신옹균씨는 그 후 일본 사관학교를 거쳐 박씨는 공군소장으로 9.28후

전사하였다고 하며 신씨는 지금 육군 중장인가로 있다는데 나는 어렸을 때

신씨집에 잘 놀러 갔었다.

어린 마음에도 신씨의 부친인 신태영씨가 한국사람으로서 일본 육군대위로

계시는 것이 퍽 신기하였다.

나는 이 신태영 장군의 사랑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음악과 미술을 즐기던 나는 틈 나는 대로 콤파스를 메고 산수가 좋아

유달리 많은 태조 이성계의 유서 깊은 고적을 찾아 옛날을 추상하며

그림을 옮기고 한없이 꿈을 쫓았다.

열세 살 때 봄이다.

까닭도 모르게 몸이 무겁고 얼굴이 붓기 시작 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나의 나병의 시초였던 것 같다.)

하도 답답하여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의사가 온천 전지요양을 하면 낫는다고 하여 여름 방학 때

아버지를 따라 금강산 온정리에 갔다.

-나는 병 고치러 간다는 것 보다는 금강산 구경이 기뻤다.

산수를 좋아하는 나는 금강산의 웅대한 자연미에 어린 가슴에도 일맥의

법열경(法悅境)에 잠겨 해금강 바닷가에서 산타루치아를 부르고

콤파스위에는 반 고호 빛깔로 수채화를 그리며 명쾌해 지기만 했다.

약 한 달 남짓한 온천과 삼방약수를 거친 내 몸은 효험을 얻은 것 같았다.

돌아와서는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에 바빴다.

난관을 돌파하여야만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당시

소위 내선공학이라고 하여 가장 난관 중의 하나라는

이리 농림학교에 응시하기로 하였다.

함경남도청에서 19명의 수험자가 있었는데 합격한 자라고는 나밖에는 없었다.

열네 살 때 봄이었다.

호남땅 이리로 공부하러 갔다.

덮어 놓고 먼데로 간다는 것과 낯선 땅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학교는 간다는 것과 낯선 땅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학교는 자연환경과 시설이 놀라울만치 좋아서 오란다식 정원에 진기한 화초며

나무들이 나의 시각을 아름답게 하였다.

그러나 일인과의 공학인지라 나라 없는 차별과 모욕감에 마음은

복잡하고 우울하기만 하였다.

우리 한국 학생들은 민족적 마음에서 일인 학생한테 무엇이든지

져서는 안되겠다는 반항심에 하학후에는 운동에 열중하고

밤에는 공부에 열중하였다.

우리의 운동실력은 왜씨름과 축구로는 당시 국내에서도 가장 강한 팀이었다.

왜씨름은 조선대표로써 언제나 전일본 대회에까지 출전하여 일본 전체를

통털어서도 가장 우수한 팀이었고 축구는 전통이 있는 배제고보 팀쯤은

일도 아니었다.

낭만의 꽃은 피어

나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운동을 아니할수 없어 육상경기부에 가입했다.

일학년 때부터 장거리 선수로 출전하였고 전주~군산 간 호남중학교

역전 경기대회에 어린 나이로 수타트 구간이나

라스트 구간을 담당하고 우승도 하였다.

가을마다 있는 도시대항 역전경기에도 전 이리팀의 라스트 구간을

담당하는 선수가 되었다.

밤에는 외국 번역소설에 취미를 붙여 덮어놓고 읽었다.

고향의 집에서는 공부는 하지않고 운동이나 소설책만 본다고

편지마다 야단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상급학교 수험공부를 하라는 꾸지람이었다.

삼학년 겨울, 나는 운동을 단념하였다.

그러나 못된 송아지 엉덩이부터 뿔난다고 이때부터 학교공부고 수험공부고

모두 내 알 바가 아닌 것처럼 버리고 시나 소설의 습작을 한다고

원고지의 칸칸을 메우고 있었다.

소설에 있었서는 불란서 작품과 북구라파 작품에 심취하였고, 작가로는 발작크,

앙드레지드나 헬만헷세를 제일 좋아하였다.

내가 전공하는 수의축산과는 전문학과가 어려운 탓으로 그냥 놀고

먹을 수는 없는 공부였으며 나는 장래에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짓지 못한

가운데서 학교공부와 상급학교 수험공부와 문학과의 갈등 사이에

정말로 숨이 콱콱 막혔다.

이때 나는 어려서부터 사귀었던 누이동생의 친구인 Y여고보의 R이라는

쏘프라니스트를 알게 되었다.

그는 하얀 목련 같이 맑고 소소한 여학생이었다.

나는 그녀를 언제나 장미꽃 화려한 꽃밭 속 행복의 여왕처럼 모시고

사랑하는 것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의무인양 생각하곤 하였다.

R이 나에게 말하는 소리는 이 세상의 소리 같지 않게 들렸다.

R은 세레나데를 꿈 같이 불렀다.

더욱이 솔베이지의 노래는 정열적인 낭만으로 나의 심금을 흐느끼도록

울리고 마음이 났을 때는 춘희 중의 축배의 노래를 목놓아 금속성 소리로

뽑으며 당시 데뷔한 데이나 다빈처럼 되겠다고 하였다.

R은 음악학교에 간다고 하였다.

나는 음악 한다는 것을 말리고 좋은 아내가 되려면 가사과나

공부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나는 이때 단편소설[어머니], [두견새]를 잡지 [조광], [삼천리]에다

에다 각각 투고하였으나 아무소식이 없었다.

인생파멸의 첫 선고

오학년 때 봄이었다.

팔 다리에 심한 신경통이 생겨 밤잠을 잘수가 없고 이 고통이 지난 뒤에는

몸 전체의 말초부 양역에 콩알 같은 결절이 생겼다.

나중에는 터져서 헌 데가 되며 의사의 진단을 받았으나 인패디고라 하면서

고약과 석형등(石螢登)을 쪼여주는 정도였다.

그래도 더디게 치료는 되나 궤양은 끝없이 퍼지기만 했다.

악종으로 치료가 되지 않아서 딴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니 매독이라고 하면서

106호 주사를 놔주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성대부속병원의 진찰을 받았다.

기다무라 박사는 신경을 만지고 바늘로 찌르곤 하였다.

진찰이 끝난 뒤 조용한 방에 나를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이 문둥병이니 소록도로 가서 치료를 하면 낫는다고 하면서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나는 뇌성벽력 같은 이 선고에 앞이 캄캄하였다.

정말 내가 그런 병을? 그렇지 않다고 나는 부정해 버리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피부과 권위자가 말하는 데는 불안하기만 하였다.

만약 그 박사의 말대로 문둥병이라면 무엇보다도 R을 어떡할 것인가

하는 오뇌 속에 절망과 파멸이 눈 앞에 너덜거리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절망의 산곡에서

다시 최박사에게 진찰을 받았다.

최박사는 고향을 묻는다.

고향집이 함흥이라니 최박사는 자기도 함흥이 고향이라고 하면서

친절하게 진찰을 하는 것이다.

최박사는 나의 오른쪽 손목에서 한 뼘 가량 되는 피부가

감각이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칼로 찔러도, 베어도 아프지 않고 찬 것, 더운 것도 분간할 수 없는

그 마비부위에 전혀 땀이 나지 않는다.

이 증세로 나를 문둥이라 결정지었다.

학교에 휴가원을 내고 다시 금강산으로 가서 요양하겠다고 결심했다.

서울에서 피부병학이란 전문의서 몇 권을 사고 또 도서관에서

나병에 관한 문헌을 모조리 찾아보았다.

나병에 효과가 있다는 대풍자유(大楓子油)의 에칠 에스텔화한 일본제

히도노가린과 독일 바이엘젤 안치 레프로르의 주사약을 사가지고

금강산 신계사 근처의 어떤 여관에 유숙하게 되었다.

극락현 산 너머서 온정리 온천을 다니는 것이 즐거웠고 때로는

구룡연 비로봉까지 다니며 조석으로 들리는 목탁과 범종소리에 고민이

진정되곤 하였다.

집에다는 몸이 쇠약해서 금강산에 와 있으니 백원만 보내달라고 편지를 하였다.

다만 세상에서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또한 죽음으로써 생을 청산하려고 팔담 위에서 구룡연 폭포수를 몇 번이나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천고와도 같이, 절망의 울음과도 같이 폭포수가 하늘에 천둥하는 데는

차마 죽어지지를 않았다.

약 한 달 남짓 자침주사를 맞았는데 부작용이 심했으나 효과는 좋았고

그 악질적인 궤양도 검은 구름 같이 사라져버리고 점점 새 희망이 고동치기만 하였다.

여름방학 때 R이 찾아왔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만 수그렸다.

나는 R에게 병을 고백하는 것이 옳을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깜깜한 가슴이 메도록 슬픔이 터지고 어떤 기회에 말한 것인가 하면서

우울하기만 하였다.

하루는 비로봉 구경을 마치고 귀로할 때 한적한 마의태자능에서

나의 병을 고백하려고 하였다.

그러려고 했던 것이 R이 태자의 이야기를 꺼내고 태자의 인간성이나,

낙랑공주의 사랑을 슬퍼하는 것이다.

다정다감한 R에게 지금 말한다는 것은 너무나 충격을 주는 것 같아서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찢기운 비련의 화편

어느 날 집선봉 기슭 우거진 숲에 옥 같이 흐르는 산수물가에서 R에게

고백을 하였다.

백년을 굳게 기약한 사랑에 R을 진정코 사랑하는 까닭으로 R의 행복을 위해

깨끗이 이별해야 한다는 고백은 차라리 R과 백년을 맺는다.

는 기쁨 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슬기로운 것 같이 생각하였다.

R은 내 말의 하나하나를 들으면서 꽃가지의 잎사귀를 찢어서 물에 띄워 보낸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그 붉은 꽃마저 물에 띄워 보낸다.

나는 그때 이런 시를 읊은 것을 기억한다.

낙화유수

외톨리 푸른 잎 하나가

심산벽수 시냇물 흰구름 위로 떠나갑니다.

어느 사랑의 찢어진 화편이라 할까

천도빛 꽃송이 하나가

검은 밤 시냇물에 별 사이로 흘러갑니다.

어느 실연의 주검이 떠나는 것이라 할까

나로서는 설사 이런 일이 아니고 다른 것으로 나를 배반한다 할지라도

내 몸이 문드러지고 내 목숨이 죽지 않는 한 내 영혼에 R을 구원의

애인으로서 자위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R은 울지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동요하지도 않고 나의 독백을 듣기만 하였다.

R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를 그렇게 생각하다니 저는 슬퍼져요.

저는 하운씨를 일생의 남편으로서 언약한 이상 하운씨가 불운에 처했다고

버리고 가는 그런 값싼 여자가 아닙니다.“

하고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나병의 불행한 병리학을 말하였다.

사랑하는 여성을 일생동안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나의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고 이갸기하였다.

R은 사람은 일생이란 똑같은 과정을 가는 것이 아닌가고

나에게 말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R에게 안면상 덮어 놓고 이 자리를 얼버무려 넘기려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그때야 흑흑 흐느끼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그다지도 몰라주니 분한 마음에 슬퍼진다는 것이다.

나는 R이 정말로 나하고 일생을 같이 한다고 맹세할 수 있다면

같이 자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때 생각으로는 같이 죽는 것만이 영원으로 맺는 사랑이라 생각하였다.

R은 정말로 내가 불쌍해서 자살할 수가 없다고 하며 자살은

무의미한 패배라고 한다.

R은 나의 병이 어떻게 악화되건 그런 것이 자기의 결심을 변동시킬수는

없다면서 자살을 굳이 막는 것이었다.

어쨌던 R을 함흥으로 보내는 것이 나의 도리인상 싶어서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R은 방학동안이나마 병 시중을 하겠다고 돌아가지 않았다.

무대는 동경으로

우리들은 분주한 신계사를 떠나서 송전 해변가

어떤 어촌집에 방 한 간을 얻고 R은 신부처럼 살림을 꾸렸다.

때때로 R이 주는 근육주사를 맞으며 치료를 하였다.

연륜이 백여 년 지난 해송이하얀 모래바X 위에 기묘한 자세로 서있고

그 사이로 해당화는 붉게 피어 수평이 아득한 푸른 바다는

갈매기와 더불어 청춘이 늙지 않고 파도의 파랑색이 멋지게 내 보이는 곳이었다.

나와 R은 이곳에서 젊음을 즐기고 노래 부르며 한달 동안 지냈다.

그리고 우리는 개학을 앞두고 서로 남북으로 갈라졌다.

이듬해 나는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보기 좋게 낙제하고 동경의 성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동경에서의 2년 남짓한 생활은 지금까지의 나의 반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절이다.

사촌들이 넷이나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나까지 끼어서 다섯이 되었다.

R은 자주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인생이니 자연이니 사랑이니 하는 사연속에 면면루루하게 자기 애정을

쏟아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몇 차례 오가는 편지에 회답을 한 번이나 할까 말까 하였다.

나는 본래 여행을 즐겼는데 일본의 무성한 자연은 내 여행열을 돋구어 주었다.

나는 동경에 와서는 문둥병이 정말로 완치된 것만 같아 스스로 새로운

희망에 불타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몸에 병을 지니고 난 뒤의 심경은 차차로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고교생이 즐겨하는 만풍의 스토므는 성미가 맞지를 않았다.

영화는 불란서 영화를 즐겨 보고 독서는 여전히 명작 번역소설만 읽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R은 여고보를 마치고 동경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동경T여전 가사과에 입학했다.

우리들은 하숙을 따로 하면서 공일날에 만나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며

극장구경이나 긴자거리에 서성대거나 무사시노 같은 들로 소풍하곤 하였다.

동경에 와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소주 두 되쯤 먹는 것은 나의 기분을 맞추는 정도였다.

동경에서 R과 일 년쯤 있었다.

나는 몸에 또 이상이 생긴 것을 느꼈다.

그 악마 같은 결절이 양성으로 진행되는 것을 알수있었다.

완치 된 줄만 알고 있었는데 재발이라고 생각하니 나병에 대한 공포감과

저주감과 절망감에 허둥거리게 되었다.

나는 아주 학교란 것을 단념하고 이제는 죽든지 치료하든지 결단을

내야겠다는 결심에 이를 악물며 지난 일을 후회했다.

꿈을 안고 북경으로

나는 동경을 떠났다.

R에게는 병이 재발했다는 편지를 보내고 사촌들에게는 집에 다니러 간다고 하고 떠났다.

R이 없는 동경역 구내는 캄캄하기만 했다.

청춘의 신기루는 어디로!

정말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 세상을 하직하는 암담감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유상무상의 이 땅 위의 것은 나와는 인연이 없는 딴 세상 것 같이 보여졌다.

현해탄 검푸른 바다에서 몇 번이나 하나밖에 없는 자살을 각오했으나

곧 치료될 것이라는 요행을 바라니 죽어지지를 않았다.

고향에 들렀다가 또 다시 도피하듯이 금강산으로 갔다.

반면 처절한 슬픔속에 마음이 허탈해버렸다.

죽음 같이 사무쳐 오는 고독과 슬픔 속에 R이 그리워진다.

내가 죽자고 사랑한 사람이란 이 세상에서 여태껏R 한 사람 밖에 없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도 가슴에 사무쳐온다.

나는 점점 R을 못견디게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랑이 일보 전진 할수록 고통이 심해지는 것이었다.

그 일보가 R과 멀어져야 할 것인데 하는 생각이, 애련이(고뇌의 몸부림)

잠 오지 무수한 밤을 계속 시켰다.

불 같이 사모하던 어느 여름날 R은 내 앞에 나타났다.

R은 많이 변해졌다.

몸가짐에서 여자태가 풍겼다.

시월달에 나는 산해관을 경유해 북경으로 갔다.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에뜨랑제는 웅대한 자금성 만수산의

호화찬란한 색채와 선과 원의 신비경에 마치 동화국의 용궁성을 보는 것

같은 감상이 떠올랐다.

가로수는 우거져 숲이 되고 아카시아꽃은 눈 같이 쌓여 거리는 눈세계 같다.

북해공원의 라마백탑 높은데서 내려다보는 북경이란 정말로 낭만의 공원이었다.

북경대학을 수험하려면 먼저 주중일본대사관의 자격시험과 신원조사에 통과되어야 한다.

나는 열달 동안이나 북경어를 공부하였다.

먼저 일본 대사관의 자격시험을 치렀다.

북경대학의 시험문제를 보니까 영어, 수학, 생물, 물리, 화학 등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중국어는 백지를 내다시피 하였다.

농학원은 경쟁이 없어 무난히 합격하였다.

전공학과로 축목과로 택했다.

대학공부는 내가 조선에서 농림학교의 수의 축산과를 나왔기 때문에 별 것은 없었다.

나는 여기서 남녀공학의 분위기를 처음 맛보았다.

젊은 중국 인테리 여성들은 명랑하고 쾌활했다.

물고기 같이 싱싱한 여학생들은 모두 자전거에 흰 운동화에 경쾌한 몸차림이다.

R과 별리한 공허 속에 이 여대생들과 벗이 되어 새로운 애정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북해공원의 연못에 달밝은 밤이면 이 여학생들과 배를 타면서 천년

우거진 버들숲에서, R을 단념하려는 결단성에서 나는 동키호테처럼

그네들 세계에 파고들어 갔다.

절망된 내 인생을 어떻게 즐겁게 살다가 거리에서 보는 그런 문둥이의 화상이

되기 전에 죽음으로써 곱게 생을 청산할까 하는 생각이

늘 머리에 맴돌고 있었다.

애증의 세계에서 방황

닥쳐오는 뻔한 운명을 눈 앞에 놓고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고통이었다.

나는 괴로운 고통을 모면하려고 북경의 눈오는 밤거리를 독한 술로 헤메는 돈환이 되었다.

나의 병증세는 아직은 내가 문둥이라고 말해도 남들은 알아볼 수 없는 정도였다.

여행이야말로, 무주색의 석불총의 나의 영원한 꿈이었고 좋은 신진대사의 성풀이었다.

몽고의 사막이며, 무주색의 석불총의 불타의 세계를 방황하든지 남쪽으로 양자강, 상해,

남경, 소주 땅 한산사의 종소리에 옛 명싯구를 생각하며,

절세미인 서시의 유적을 찾으면서 개행무상의 허망에 불쌍한 나를 위로했다.

R을 환상처럼 그리고 R이여! 불러본다.

대륙의 방랑길에 R에게 부치는 서정시를 반추하면서 R을 생각했다.

나는 R을 결혼식 첫날밤까지 연인이라고 하겠다.

연인은 언제나 젊은 시절의 자장가이며 꿈과 신비가 싸여 있는 까닭이라 하겠다.

이 꿈과 신비의 베일에 싸여야만 사랑의 매력을 느끼고 영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연애하는 시절에는 남자나 여자나 상대편의 비밀을 한꺼풀 한꺼풀

제쳐 놓는데에 최대의 노력을 하며 애를 태우는 것이 아닐까.

연애의 비밀이란 섹스를 알기까지의 절정에 도달하는 과정이 아닐까?

연애에서 섹스를 알게 되면 그 연애는 어떠한 의미로서도 불행한 것이 아닐까.

또 연인에게 섹스를 요구한다는 것은 상대를 매춘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섹스는 결혼의 첫날 밤 이후의 남녀 인생의 좁은 문이 아닐까.

나는 당시 이러한 자기류의 연애론을 신봉한 까닭으로 R과는 그처럼

친밀한게 접촉을 하였지만 절대로 섹스관계가 있지 않았다는 것을

천지신명에게 맹세할 수 있으며 아직까지도 내가 R을 영원한 애인으로 그리워하는 것도,

사랑의 매력을 느끼는 것도 아마 이러한 연애론에서 오는 영감이라 하겠다.

하숙을 소주 호동에서 화평문의 후손공원으로 옮겼을 때 북경대학의 어느 호동(골목의 뜻)

에서 나는 교포 여성을 알게 되었다.

나이는 스물살 남짓하다.

멋들어진 중국옷 차림을 한 그는 S라는 협화의과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그는 내 하숙에 자주 놀러 왔으며 조국을 모르는 동포로서의 설움을 나에게 하소연했다.

조국이라는 피가 불러서 맺어주는 S와의 사랑은, R을 망각하는 화원으로

아베크 하는 것이었다.

앵두 같이 불타오른 S의 입술은 나의 관능을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S가 끄는 사랑의 길은 동요국 용궁세계를 방황하는 영화의 땅 북경의 미로의 비밀 속에

소수(소(덧말:蔬)수(덧말:水))처럼 흘러가고 만수산 공명호 위에 구름 같이 십칠공교를

S와 건너면 마치 무지개를 타고 사랑의 천국으로 등선하는 것 같은

황홀경에 잠기는 것 같았다.

S는 나에게 고향으로 가지 말고 자기하고 북경땅에서 살자는 것이다.

그리하는 것만이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나의 품안에

다가 드는 것이었다.

자학의 사념

북경은 고전적 세계의 자랑인 대성곽도시다.

중국이 캐캐묵은 봉건을 차버리고 일어선 것은 5.4운동이었다.

나는 그 후의 새로운 제네레이션을 호흡하면서 고대와 현대가 융합하는

도가니 속에 새로운 감각이 탄생하는 북경의 십자로에서 S란. 메리켄 여성을

닮은 아미와 망각의 세계를 지향없이 방황하는 것이었다.

R은 때때로 불타는 사랑의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R과S라는 성격적으로 차이가 있는 두 여성이 속삭이는 사랑의

이모저모를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 반투명의 아름ㄷ가운 두 가지 빛깔의 하나는 열대성 식물의 꽃 빛깔 같이

정렬적이며 또 하나의 빛깔은 북극의 백야의 꿈 같은 오로라 빛깔의

무늬 같이 명상적인 것이었다.

내 마음에 콘트러스트로 품어오는 두 빛깔은 그러나 서러운 것이었다.

나는 젊음을 즐길 수 있는 청춘에 진정 사랑할 수 없는 두 여성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안타까움에 한없이 술과 더불어 북경의 눈오는 이른 봄을 떠돌곤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또 다시 나병이 재발했다.

온몸의 말초부에는 결절이 콩알 같이 주롱주롱 달리고 퍼졌다.

문둥병은 이다지도 악마같이 악착스럽게 내 몸을 썩히는 것이다.

짧은 내 청춘에 벌써 세 번이나 재발하다니 공포와 전율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이렇게도 인간의 대열에 끼일 수도 없는

증오와 저주의 문둥병이 세 번이나 재발하는 것인가.

나는 내 자신을 자학하는 생각이 치민다.

병치료를 계속하느냐 생명의 제로를 택하느냐 하는 절망의 고민 속에

나는 지향도 없이 표현히 길을 떠났다.

해로를 통해 청진과 대련을 경유하여 요동땅 옹악성 온천으로 갔다.

발해 바다에서 죽어볼까도 하였다.

그러나 머리에 푸른 새 같이 떠 오르는 것이 있다.

죽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패배라고 하던 R의 말이 번개 같이 내 머리에 명멸한다.

지금 이 말이 나의 생에 있어 지주(지(덧말:支)주(덧말:柱) )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차라리 이 푸른 바닷길을 따라 어디로든 눈물 같이 서럽게 이 푸른 길 다하는

세계의 끝까지 방랑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곤 하였다.

슬픈 항구의 방랑

나는 자유항구 대련의 네온이 불야성 같이 빙글빙글 도는 거리에서

돈환처럼 독한 술 을 마시며 백계로녀(白係露女)의 풍만한 육체를 억세게 애무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세계의 방황도 허탈한 마음을 메울 수는 없었다.

여하튼 하나밖에 없는 자살로 나를 청산하지 않는 한 치료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결심이 나를 채찍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애당초의 생각대로 옹악성 온천에 갔다.

한 열흘 동안이나 탕치하니가 고독감에 견디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관비가 비사 있을 수가 없었서 다시 대련으로 돌아왔다.

성포 해수욕장 가까이에 있는 중국집에 하숙을 정하였다.

성포는 영화에서 보는 남불의 니스 같이 아름다운 별장지대이다.

나는 이 아름답고 말쑥한 자연환경에서 마음이 안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가끔 여순까지 놀러 갔다.

여순의 로서아, 로마 누르식 거리에 나는 양식이 다른 제정 러시아의 화려한 문화에

액소틱한 정서를 맛보면서 이령산을 위시한 노일전쟁의 피투성이의 전적지를 구경하고

백옥탑 높은 데서 발해와 동양을 괴롭히는 두 늑대들의 아우성을

추상 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또 유달리 흥미를 끄는 것이었다.

박물관에 많이 진열되어 있는 고구려 시대의 유품이었다.

고구려 여성의 미이라를 보고 다시금 옛날을 꿈 같이 더듬어 이 요동땅이

정말 우리 고국인양 생각되곤 하였다.

이처럼 여순 땅에 정 이 들어서 왕래하던 차에 나는 교포의 집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은 일본인 어업회사의 어부라고 한다.

그는 고기잡으러 가는 동안 벎은 아내와 육십이 넘은 장님 어머니를 사고무친한

외국 땅에 두게 되어 불안하고 모친이나 아내가 불평을 하니 나보고 자기집에

와 있으면 좋겠다고 요청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어부의 말에 대뜸 대답하기가 곤란하였다.

그러나 나를 학생이라 호칭하는 이 어부는 기어이 한 집안 식구 같이 살자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다 못해 이 말에 응락하여 어부의 집에 신세지는 사람이 되었다.

애욕의 갈등 속에서

나는 졸업을 일 년 앞두고 졸업논문을 준비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축산사(朝鮮畜産史)를 주논문으로 결정하고 부논문으로는

조선우의 지방적 체격연구(朝鮮牛의 地方的 體格硏究)와 이밖에

몇가지를 선택하였다.

조선축산사는 내가 알기에는 아직도 미개척분야인듯 생각한다.

이 연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역대의 고서를 모조리

섭렵하지 않고는 할 수 없었다.

도저히 북경 땅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해 7월달 하기방학에 귀국하였다.

서울 총독부 도서관이나 고서점을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고서를 수집하여

논문의 뼈대를 추려보았다.

초가을 다시 북경에 갔다.

다음해 3월에 논문을 제출하였다.

일본의 군정하에 있는 북경대학의 교수진은 실력과 쓸개가 있는 학자들은

모두 장사니 계림이니 하는 오로지 피난해 버린 후였고

교수진에는 일본인 교수도 몇몇 끼어 있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와야할 나는 S가 붙잡는 안타까운 강요에 그대로

북경에 머물지 않을 수 없었다.

S가 육박하는 애욕과 R이 주는 한결 같이 변함없는 구원의 사랑에

나는 두 애인을 놓고 저울질 하는 것 같은 것이었다.

나는 흐리멍텅한 모호성으로 두 여성을 점유하고 어색(漁 色S)하는,

세상에 흔히 보는 남성들의 야욕과 흡사 통하는 것이 있어 나 자신이

비열해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하는 수 없는 사랑의 불장난에

내 몸을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R이나 S나 놓치기는 아까운 여인들이라는 것에 나는 하는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나의 경우에 처했을 때에 R과 S를 동시에 점유할 수 는 없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곤 하였다.

또한 일부일부제(一夫一婦制)는 어떤 깍쟁이 사회주의 신봉자가 악을 쓴 것인가

하는 원망도 하여보곤 하였다.

나는 R과 S를 같이 입적시키고 같은 자리에서 하나의 부분단위로 결혼식을 올리고

같은 신방에서 첫날밤을 한 자리에서 마치고 셋이 일생 같이 살 수 없을 것인가

하는 엄청난 이상을 추구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한 심정에서 나는 대학원에 머물러 보는 우거(愚擧)를 하게 되었다.

영원히 가버린 여인 S!

하루는 나는 어디까지나 이지적인 S룰 보고 내가 레푸라 환자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S는 레푸라, 하면서 곧이듣지 않는다.

S는 자기를 버리자는 구실이라고 하면서 믿어주지 않는다.

정말이라면 진찰해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서슴치 않고 환부를 보여주었다.

증상이라고는 궤양이 나은 흉터밖에는 없었다.

그는 나의 육체에서 지각마비부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 처럼 못찾는다.

그래서 나는 오른쪽 팔을 내밀고 지각마비부를 보여주었다.

땀이 전혀 안나고 칼로 찢어도 아프지를 않는 이 지각마비부를 본 S는

경악하는 것이었다.

레푸라란 병은 신의 최악한 실책과 큰 과오 중의 하나다.

이 신이 저지른 과오의 죄를 신이 받아야 할 것을 사람이 대신 받아서

문둥이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 이다지도

비참한 비극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S는 자기 청춘의 아름다운 로맨스가 덧없다고 비탄하는 것이었다.

S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하면서 키스의 세례를 나의 얼굴 구석구석에다 뜨겁게 했다.

“참 보람 있고 아름다운 사랑이었다.”

고 하면서 끝이 없는 울음을 터뜨리고 통곡하는 것이었다.

S는 나하고의 사랑은 후회하지도 않고 또 원망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비극의 종말까지 순결하고 깨끗하게 사랑하였다는 데에 천지신명에게

대해서라도 부끄럽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을 말했다.

그 다음 날 S는 나를 찾아왔다.

중화(中貨)300원과 자기의 금반지를 나에게 내밀고서 이 돈을 병치료에 써달라는 것이며

금반지는 자기의 기념으로 언제까지나 간직하여달라고 했다.

자기가 보고 싶을때에는 자기를 본 듯이 반지를 보고 눈물을 흘려달라는 것과

영원히 행복하기를 빈다는 말을 남겨 놓고 어딘가 가버린 것이었다.

나는 이 찰나에 어리둥절하고 어떻게 할까 당황하기만 하였다.

다음 순간 S의뒤를 따랐다.

S는 보이지 않는다.

S의 집으로 찾아갔다.

S는 없었다.

며칠후.

신문에 [모여대생이 실연 끝에 음독자살]이란 기사가 있었다.

그것은 S가 자살하였다는 보도였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슬펐다.

사람이 살다가 이런 일도 있는가 하는 참괴한 잔한(殘恨)이 앞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S의 뒤를 따라 자살이라도 하려고 그냥 조양문 앞 북경역을 무작정 떠나버렸다.

몸부림치는 백목단

S는 아미로서 어떤 거리를 두고 사랑하였건만, 또 소극적인 사랑이었건만,

S가 나를 무작정 좋다고 끌어당기는 자리에 내가 따라가는 것이건만

막상 S의 비참한 최후를 보니 R에게 대한 그칠 줄 모르는

나의 사모는 공허한 동요 같았다.

S의 죽음이 주는 엄청난 충격에 새롭게 S가 안타가이 그리워지는 것이었다.

몇 번이고 S의 뒤를 따라가려고 마음이 설레는 눈물이 내가슴을 에이며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S가 죽음으로써 나에 대한 S의 진실을 알게된 안타까운 후회는 나를 부표처럼

둥둥 지향없는 몽류병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지향없이찻길 닿는 대로 가버리는 것이 봉천이고 할빈이고 러시아

밤거리를 헤메이면서 독한 워트카술을 마시며 마음의 간 곳을 잊어버릴 때에는

어렸을 때에 여고보에 다니는 누나가 부르던 카츄사의 노래든가

윤심덕 [사의 찬미]에 심정을 적시고 하였다.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헤매며 닿은 곳이 바로 고향땅 함흥이었다.

R은 동경에서 T여전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R은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하며 집에 찾아왔다.

R은 이제는 결혼할 때가 아니냐고 재촉했다.

나는 R에게 나의 병의 장래의 비극적인 파멸을 말하면서 R의 행복을

진심으로 비는 뜻으로 덧없는 인간의 애정을 끊자고 하였다.

이 말은 나로서는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참혹한 말이었다.

우리들은 밤이 깊어가도록 울었다.

그래도 R은 문둥이라도 좋다는 것이다.

문둥이면 어떻고 성하면 무슨 뾰족한 수가 떨어지는 것인가.

사람의 사는 진리가 건강, 불건강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나를 서럽게 하는 것이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나를 붙잡고 몸부림하는 몸과 몸이 부딪치는 R의

육체의 탄력은 벌써 스무살 넘은 여자의 활짝 핀 모란꽃빛 윤기의 잇트가

나에게 반응과 작용을 거세게 부비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저러한 침울한 복잡을 잊으려고 무척도 잠오지 않는 밤을

새우면서 울었다.

모성애에 울며 울며

역겨움에 낭비한 젊음도, 애달픔에 지쳐버린 사랑도 불운의 한밤중

어둠 속에 뉘우침을 묻어버리고 나는 세상도 사랑도 원망하지 않고

이 세상아 아름답게 잘 있어라 하는 마음이 치솟는다.

하나의 내 육체를 문드러 놓는 문둥병은 잔인하고도 악착한 것이다.

제로의 인간이라기 보다 앞으로 살아갈수록 마이너스 인간이 되어

이 비극을 내 자신이 소화시켜야만 할 거다.

제로에서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를 얻는 동화작용이 있어야만 절망에서

기어올라갈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핏줄기에서 따스히 치솟는 것을

감각할 수가 있었다.

나는 집에서 벙어리처럼 누구하고도 말을 하지 않고 내 방에서 침울한 고독을

독서로 메꾸고 이 독서로도 견디기 어려운 고독이 시장기 들적에는

측음기를 틀어놓고 음반의 음률로써 나의 이메지의 사람을 불러놓고

환상과 대화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절망적 고민에 어쩔 줄 모르고 계신다.

내가 고민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내 병이 회춘할까 어머니는 자기 목숨을 회생시켜서 내 병이

나을 것이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각오까지 하고 계신다.

허탈하신 어머님은 점쟁이로부터 산소의 이장, 무당의 푸닥거리, 절의 불공,

하다못해 성황당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능 하신 모든 신에게 나의 쾌유를 비는 것이다.

비오는 밤이거나 눈보라 치는 밤이거나 산매를 두려워함이 없이 지성토록

산기도를 올리러 가시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절망에서 오는 고행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사코 말려도 두 손 모아 합장하며 소지 사르시는 열도의 어머니의

몸은 점점 여위어 파리해지시며 퍽 늙어지셨다.

어머니를 안위 시키지 않으면 금새 돌아가실 것만 같은 우려감이 내 병보다 앞섰다.

동생들도 기를 펴지 못하고 우울한 표정에 웃음이 없는 슬픔에 싸인 집안이 되어버렸다.

나는 나 하나로 말미암아 온 집안 식구를 불행에 빠뜨려 놓은 것에 대하여 점점 심각하게

나를 원망하고 스스로 자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참한 가운데서도 나에게 청혼하는 중신애미니 하는 사람들이

내 집을 들락날락하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볼 때 어처구니도 없다.

그러나 아직도 외관상 나는 한 여성과 결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사실을 반추할 때 내 자신이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R이 내 집에 가끔 오는 때에는 집안에 훈기가 떠도는 것을 나나 가족들이

느끼는 것을 감촉할 수 있었다.

R은 나에게 어딘가 가버리자는것이었다.

자기가 취직이라도 하면 생활은 할 수 있지 않냐고 하면서 이 세상의 끝까지라도

가보자는 것이었다,.

이 일을 결정 못하면 자기의 처지가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자기 집 에도 중신애비가 들락거리며 흥정이 익어간다는 것이다.

나는 R에게 시집을 가라고 권하였다.

나 이외의 모든 남성은 그녀를 행복하게 하여 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하여 주었다.

정말이지 이 세상은 건강만 하면 과연 그렇지 않은가?

이 북위 40도에도 봄은 온다.

나는 서러울 때에 반용산(盤龍山)에 소풍을 하며 숲속의 봄을 한없이 울어

눈물이 땅 속에 스며들도록 울었다.

잎새가 파아란 수양버들이 칠칠 늘어져 바람에 금방울 은방울 소리로

자랑자랑 울고 있었다.

통곡의 생애

새파란 버들가지를 붙잡고 청춘이 안타까워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솟아 오른다.

예날의 분홍빛 치마폭이 수줍어 하던 밀회는 어딘지 가버리고

여기 있는 것은 눈물과 문둥이 뿐이니 어허 통곡이 나오는 것이었다.

이 심경을 읊은 것이 바로 봄이라는 시가 되었다.

제일 먼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좁은 지역에도 한 포기의 꽃을 피웠드냐

하늘이 부꾸러워

민들레꽃 이른 봄이 부끄러워

새로는 돋을 수 없는 빨간 모가지

땅 속에서 움돋듯 치미는 모가지가 부끄러워

버들가지 철철 늘어지 초록빛 계절 앞에서

겨웁도록 울다 가는 청춘이요 눈물이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한 먼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요

아버지는 집안 되어먹어 가는 꼴이 말이 아니라고 어이 없으신 한숨을 내쉬셨다.

아버지는 나보고 기분전환 삼아 취직이라도 할 것을 권하며 함경남도청

축산과에 취직을 시켜주셨다.

며칠동안 다니고 보니 내 고장에서 더욱 집에서 다닌다는 것은

기분이 전환되기는 커녕 우울하기만 하였다.

어느 지방으로 전근운동을 하였다.

축산과장은 도에 있는 것이 출세가 좋다고 말린다.

그러나 뜻을 주장하니 면양연구(綿羊硏究)를 해보라고 하면서

장진군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황무지 개척의 열광

5월이라는데 여기 황초령 마루턱 표고(標高)1,100m의 바람은 아직도

겨울이고 얼음이 골짝 골짝 일어서 하얗다.

화전민이 여기저기 살고 있는 개마고원을 달리는 기차는장난감 기차 같이

원시 빙하시대를 뚫고 가는 것 같다.

나는 이곳에 와서 정말 농학방면을 공부하였다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넓고 넓은 개마고원의 고대(高坮)는 아직도 잠자고 있는

우리 나라의 보고라고 생각하였다.

1,100m의 넓고 넓은 고대의 하늘 아래 첫 동리에는 몇몇 화전민이

감자와 귀리의 농사를 짓고 이것을 주식하고 초근목피를 부식하는

태고 그대로의 소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집이라는 것도 아름드리 나무를 통째로 쌓아올린 원시시대의 나무집이며

생활도구도 목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당시 이 개마고원을 어떻게 현대화하고 이 사장된 지역을

개발하느냐 하는 공상에 불타올랐다.

이곳의 개발이야말로 한국의 금고가 된다는 데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에 대하여 내가 경탄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노구지 준이라 한다.

그는 이 지역에서 일고의 가치조차 없이 흘러가는 물을 그 방향을 거꾸로 돌리는

유수방향의변경으로 수력발전을 일으키고, 근대 일본의 신흥자본가로서의

그 킨즈론은 마침내 대흥남왕국을 건설하여 인류의 복지를 증진시킨 위인이다.

나는 지금도 그를 존경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의 야망은 문둥이인 나에게 아직도 대기만상이란

신조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나도 이 고원을 어떻게 개척할까 하는 것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알래스카, 캐나다, 북시베리아, 북구 스칸다니비아 지방의

인문 경제산업을 수집공부했다.

나의 직무는 이 지방의 축산기술자로서 축산종식의 지도와 계획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화전민과 벗이 되었다.

일생을 이 망각의 고원에 묻어버리고 살까 하는 충동을 느껴 본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정말로 나는 이 고원을 잊어버릴 수가 없을 것 같다.

6월이자 첫 봄이고 여름이다.

한꺼번에 찾아오는 급 템포의 두 계절은 이 고원을 터어키 탄자 같이

아름다운 꽃밭으로 장식 하는 것이다.

정말로 고원의 자연은 말로써 다 할 수 없는 신비의 천지다.

뗏목이 양귀비 꽃밭가의 급격류로 살 같이 빠져 나가면서 목숨을 흥정하는

7월은 벌써 가을이다.

단풍이 피 같이, 추억 같이 물든 8월은 벌써 서리가 나리고 흰눈이 퍼붓는 것이다.

추석도 눈을 쓸어가며 성묘하는 이 무자비한 자연 속에 나는 고리델종 면양과

늑대와 싸우고 있었다.

겨울이라도 이 고원의 화전민은 솜 옷이 없다.

벌거숭이가 되어 빈곤과 원시 속에 유목시대의 어둠을 더듬고 살고 있다.

영화 30도 전후의 추위 속에 R은 나를 찾아왔다.

R은 이 추위에 못견디겠다고 울상이었다.

고원에 얽힌 사랑

눈, 눈, 시야라기보다는 흰눈이, 땅 위를 몰아덮는 미칠듯한 눈이다.

햇볕이 짱짱한데 눈보라치는 날이면 풍속이 거센 백설천지를 R과 나는

검은 곰처럼 눈에 빠지면서 고원을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우리는 불시 극광 그대로의 무지개가 서는 것을 보고 자연의 신비와 위업에

광야에 비는 아베마리아처럼 장엄한 기도를 엎드려 드리고 싶은 충동도 느껴본다.

R은 기도 대신 아베마리아의 노래를 부른다.

나는 행복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깊은 사색에 잠긴다.

R은 나보고 추위는 병에 해롭다며 추운 개마고원을 떠나라고 했다.

죽음보다도 더 길고 겨울밤에는 나는 폴란드의 레이몬드의 농민 같은 작품이 쓰고 싶다.

그래서 산천초목이라는 제목 아래 이 고원과 화전민을 모티브로 스토리를 엮는 것이었다.

나는 R의 말이 아니라도 고원의 영화 30도의 기후에는 견디기 어려웠고

병든 육체를 생각할 때 이 추위에 점점 무서움이 생겨지곤 하였다.

고원이 점점 싫어지는 것은 육체적 사유도 있거니와 장가를 가라는 데에는 질색이다.

또 다시 낡은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었기에 잊었던 절망과 고독이 치솟아

내가 나를 허망하게 생각하는 것이 슬픈 것이었다.

그후 나는 얼마 안가서 썩어버릴 내 육체를 생각하여 남쪽 시골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경기도 용인군에 전출하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오랫동안 염원하던 조선축산사를 완성하기로 결심하였다.

사료수집과 동국여지승람을 기반으로 한 고대지리와 이두를 공부하곤 하였다.

도축산과에서는 나보고 조선우의 사육향상의 기술에 대하여 일년기한으로

연구한 결과를 제출하라고 했다.

집에서는 손자가 보고 싶고 또 나로 말미암아 과년한 두 여동생들이

때를 놓치게 되었으니 속히 R과 결혼하라고 성화였다.

나는 내 신병으로 독신생활을 하겠으니 동생들이나 빨리 치우라고 답장을 보냈다.

결혼건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양친들은 아직도 병태가 나지 않으니 결혼을 하여도 무방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결혼명령을 거부, 설득시키는 데에 큰 애를 먹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죽어도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잘라서 말을 하였다.

썩어가는 문둥이

그후 여동생들은 시집을 갔다.

여동생들은 저희들이 먼저 시집을 가서 퍽이나 미안하다는 것과

부끄럽다는 것과 그리고R은 오빠의 이것 저것을 다 아니까 결혼을 하라는

권고의 내용의 편지를 보내었다.

태평양전쟁의 전세는 일본 본토에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내 몸에 이상이 오는 것을 느꼈다.

결절이 콩알 같이 스물스물 몸의 양역에 울뚝울뚝 나타나는 것이었다.

검은 눈썹은 자고 나면 자꾸만 없어진다.

거울을 보니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문둥이 그 화상이었다,.

기절할 노릇이다.

결절은 팔, 다리, 얼굴 할 것 없이 나날이 기하급수로 단말마의 발악처럼 퍼지는 것이었다.

이곳 저곳에서 쑥덕쑥덕 한다.

하루는 상사가 부른다.

“문둥병이 아닌가?”라고 한다.

빨리 치료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만이다.

세상아! 잘있거라 하면서 나는 창황히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땅 함흥에 돌아왔으나 이 꼴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더욱 동리사람의 눈이 무서워서 도저히 밝은 낮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진종일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람이 안다니는 호련천가 뜰에서 종일 굶으며 기다려야 했다.

이제는 정말로 문둥이 된 설움이 가슴을 찢는다.

문둥이 생활로 입학하는 분함과 서러움에 하루종일 잔디에서 울었다.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내 값이 정말로 한 푼어치도 되지않는

것을 통절하게 비관하였다.

이제는 인간폐업령이 내렸다.

이 원한을 피를 토하며 통곡하였다.

몇 백번 고쳐 죽어도 자욱자욱 피맺힌 서러움과 뉘우침이 가득찬

문둥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밤이 어두워진다.

모든 것을 검게 가리워주는 밤이 온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자유와 이상과 동경을 상징하는 노래로써

파랑새라는 시를 읊으며 인간의 행복을 빌었다.

[파랑새]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우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어둠을 타서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서는 깜짝 놀란다.

어머님은 밥상을 처려오셨다.

나는 하루종일 굶었으나 밥이 먹고 싶지 않았다.

밥은 먹었노라고 이야기 하고 드러누워버렸다.

도대체 오늘 내가 겪은 일을 누구한테 하소연 할 수 있을건가.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일이지!

나를 먹어가는 나결절은 아마 나를 썩혀버리자는 심술인지 분화산 같이 터지고

궤양이 고름이 되어 온몸에 흐르는 것이었다.

감당못할 고름과 악취는 지옥삼정목(地獄三丁目)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사람의 육체세포는 고름으로 조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허둥거리게 했다.

점점 악화되어 기거조차 할 수 없고 사십도 가까이 올랐다.

의식조차 잃고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며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의식을 회복하였다기보다 세상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의식이 찾아 오는

마지막 순간에 있는 그러한 의식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나는 그 최후를 알리는 마지막 순간의 시야에 고름투성이 내 손을 잡고있는 R을

볼수가 있었다.

“하운씨, 나를 압니까.

나 R이예요.

하운씨가 사랑하던 R예요.

그리고 당신의 아내예요.

제발 정신을 차려주세요.]

제발 굳세게 살아갑시다.“

R의 흑흑 느끼는 울음이 저 보이지 않는 영원의 나라에서 말 하는 것 같이

내 귀를, 내 죽어가는 신경을 흔드는 것이었다.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

“고맙소”

나는 R에게 이 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R에게 말하였다기보다도 천지신명에게 나의 진정소발을 통곡 같이

거짓 없는 진심에서 말을 하였다.

이성을 사랑하는 시절의 젊은 여성이란 대개가 장미꽃 같이 아름다운

로맨틱을 추구히는 것이오니, 또한 무지개의 공상적인 꿈에서

처녀적인 견해를 가지고 어두운 현실적 실리와의 교작하는 속에서

주판 알을 따지는 것이어니, 그리하여 그리하여 여성들의 관념세계란

정말로 복잡하고 경험은 없었으나 그 시대의 세태상을 민감하게 보고

활기 있게 세태와 대결하는 것이리라.

R은 결혼에 대하여 아것저것 판단할 수 있는 신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저버리고 추악 외에 인생에서 아무 것도

바라볼수 없는 절망의 문둥이인 나에게 지성을 다하여 자기회생을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상식적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R의 이러한 태도를 암만 생각하여도 모를 일이었다.

하여 R에게 물어보았더니 R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R은 아직도 처녀 특유의 플라토닉한 애정의 환상인지 몽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세상이 꺼려하고 더러워하고 미워하는 문둥이인 나를

지성을 다하여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R은 내가 아니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얼마든지 갖추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R은 행복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여성이라는 것을 R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R의순결한 사랑을 마음껏 받은 행복을 생각할 때 지금이라도

이 세상을 아무 미련도 없고 한도 없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살다가 과연 몇 번이나 이렇게도 아름다운 감격에 잠길수 있는

진실된 인정을 맛볼 수 있을 것인지, R의 높고 순결한 마음씨는

나의 자포자기한 생각을 새롭게 감동시키며 마음을 광명으로

세뇌하는 것이었다.

R은 고름과 피투성이와 또 흉측하게 썩어서 오뉴월 장마통에 송장썩는

냄새보다도 더 추악하고 견디기 어려운 냄새가 나서 사람의 비위로써는

구역질 때문에 한 시도 견딜수 없는 내 방에 들어와 백옥 같이 희고

아름다운 손으로 나의 썩어가는 상처를 돌봐주는 것이었다.

죽음보다 더 큰 설움

나는 R을 보고

“R씨! R씨와 내가 이렇게 한 자리에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세상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로서는 환희에 넘쳐 흐르고 감격의 눈물로 흐느껴집니다...

정말로 이 세상에 이렇게도 무자비한 몹쓸병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당신과 어머님의 지성이 감천하여 꼭 병이 나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꼭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R이 나의 병을 구환하는 것을 여러모로 생각하여 본다.

하늘에서주는 숙명에 대하여 진실하려는

약혼자에 대한 하나의 봉건적 도덕의 의무감에서

오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플라토닉한 사랑이

결정한 감각적으로부터 시작하여 정신적인 것으로 높이 끌어올리려는

사랑을 가장 순수한 사랑의 극치라고 이상하면서 이타적인 사랑만이

사랑의 본연이라고 확신하는데에서 오는 것인지,

여하튼 전자에 속한 것인지 또는 후자에 속한 것인지 하는 분간은

차치하고 다만 R이 이처럼 헌신적인 자기 희생을 하는 것이었다.

R이 자기 희생을 나에게 바친다는 것에 나도 목석이 아닌 바에야

어찌 가슴 아픈 감회가 없으려만 다만 처절하게 오인하여

핏줄기를 뜨겁게 도는 이십대 젊은이의 눈물로 밖에는

다른 무엇으로도 표시할 수가 없었다.

R은 밤이 늦어서야 반용산 기슭가에 있는 낙민정의 자기집으로 갔다.

R은 자기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얼마나 울었을 것인가.

또 자기 집에서 밤이 새도록 혼자서 얼마나 울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때,

나는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듯한 단장회오의 눈물을 금할 길 없었다.

사랑하는 한 처녀가 자기의 청춘의 꿈인 신기루가 터무니 없이

무너졌다는 것을 느끼고 환멸의 비애를 겪었을 것을 생각하니

문득 북경의 S가 자살한 것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그 S의 시령(屍靈)이 점점 클로저업되어 내 눈 앞에 크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무서운 기가 생긴다.

원귀가 내 방에 가득차 있어 나를 괴롭히려는 것 같은

무서운 생각이 떠 도는 것이다.

나는 내가 죽어지는 것 보다도 S가 불쌍하다는 서러움과

R이 불쌍하다는 생각에 눈물을 쏟았다.

환멸의 가정환경

R이 자기 집으로 간 것도 벌써 며칠이 되었다.

R이 없는 고독한 골방은 죽음 같이 쓸쓸하고 슬프기만 하다.

그날 곁에서 썩어가는 나를 붙잡고 청상(靑孀)같이 서러워 하던

R의 모습에 나는 생명을 불어넣어 그 영상을 쫓아가면서

실존시켜 보는 것이다.

나는 그 R의 여운을 자꾸만 자꾸만 반추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반추하는 시간만이라도 나에게 허락된 운명에서

가장 기꺼운 시간으로 즐거워하였다.

R의 환상을 그려보고 그 위에다 또 환상을 그려보고

그 뉘앙스를 눈을 감으며 추상하면 S가 입체로 살아서

가까이 나를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나의 병세는 오뉴월 장마통에 썩어가는 고등어처럼 냄새가

흉악하고 구역질이 나서 코를 들 수가 없다.

이런 죽일레야 죽일 수 없는 산 송장이 있으니 집안의 꼴이

말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인 나로 말미암아 집 안이 젓담은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미칠 것 같다고 하시면서 고통 끝에

딴집살이를 하신다.

세상의 남성이란 혼자 살 수 없는 족속인가.

아버지는 나보다도 나이 어린 젊은 여자를 얻고 새로운 가정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딴집살이를 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바가지를 긁는다는 것이다.

나 듣는 데는 이런저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나 여동생들이

나들이를 올 때는 저런 병신(나를 지칭)을 나한테 맡겨놓고

당신은 당신대로 오불관(吾不關)이라고 불평을 하신다는 것이다.

집에는 볼 일 있는 사람 또 볼 일 없는 사람 할 것 없이

손님들이 많이 찾아온다.

손님들 중에는 방방을 샅샅이 뒤져보는 사람도 있고 더욱이

친족들은 아는 사이라 방방을 들여다 보는 것도 예삿일이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이 허물 없는 사이의 일이다.

그러나 이 허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좋은 점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점도 많다.

내가 겪은 지금까지의 인생이란 짧은 노정이라 하겠지만

아는 사람이란 정말로 취급곤란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더욱이 돈이 있는 사람은 수은주 같이 변하기 쉽고

대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산 송장의 생활

나는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전전긍긍하느라고 숨도 쉬기 어려운 불안과 공포

(정말로 불안과 공포속에 있었다.)에 있었다.

내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란 집안 식구 몇몇 사람 뿐이다.

말하자면 아버지와 어머니, 또 골육의 동생들, 식모 나까지 일곱사람 뿐이었다.

이밖에 아는 사람이라곤 R과 죽은 S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는 것이 정말로 싫었다.

사람만 온다치면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벽장 속에 가만히

들어가 징역살이를 해야만 하며 손님이 가기전에는 컴컴한 이 벽장 속에

하루종일이고 이틀이고 박혀 있어야 했다.

이럴 때 대 소변 보는 일, 혹은 숨을 죽일려고 하다가 기침이 나오는 일,

배가 고플 때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간 생리의 자연적 욕구가 있을 때에는

정말로 못베길 일이었다.

이런 고통을 생각할 때 내 자신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고 또 너무나 처절하고도

가엾게 생각되었다.

컴컴한 벽장 속에서 생리적 배설을 참으면서 짐승 같이 혼자서 흐느껴 울었다.

이 비감은 누구한테 창피해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다만 나만 알고 하늘이나 땅이나 알 일이었다.

이렇게 컴컴한 벽장 속에서 울다가 잠이 들면손님이 간 후에 어머니는

손님이 갔다고 벽장문을 열어 나를 부르셨다.

내가 대답이 없으면 쭈그리고 자는 나를 깨우고는 어머니도 울고 나도 울곤 하였다.

어떤 때에는 혹시 내가 집안식구와 대화를 할 때에 아는 사람이나

또는 친척이 찾아와서 내 음성을 듣고 집안 식구에게 나의 소리가 난다고

나에 관하여 물어볼 때에는 집안 식구들은 대답에 곤란과 무색을 당하면서

“아니”든가 “없다”든가 하는 부정으로 간신히 그 자리를 얼버무려 넘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수작이란 정말로 서툰 거짓말 이 뻔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곡예하는 일이란 탄로가 나기 쉬운 일이며 아슬아슬 박빙(薄氷) 위를

걸어가는 것 같기만 했다.

산산히 부서진 꿈

이런 저런일 때문에 정말 집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이 제일 싫어졌다.

진종일 생리적 배설과 또 시장기, 편하게 쉬고 싶은 것 등등의 생리적 욕구,

쭈그리고 있어야 할 피로, 끼니를 찾아먹지 못한 굶주림 속에

이제나 저제나 손님이 가시기를 고대하는 마음, 또 컴컴한 벽장 속에 숨어야할 일,

깊은 야밤중에 어머니가 주먹밥을 차입하는 일, 이런 것 저런 것나는 참을래야 참을수 없는

비굴감이 눈물이 가슴속을 청강수 같이 쓰라리게 흐른다.

패기만만하여 야망에 불타면서 동양삼국을 좁다고 떠돌아 다니던 내가 컴컴한 벽 속에

양상군자가 아닌 벽장군자의 신세가 되었구나 하는 신세한탄이 저절로 나고

자기 혐오가 치밀어 눈물보다도 먼저 일이 옳다는 생각이 앞서곤 했다.

사라지는 내 몸

나는 가족까지도 이렇게 비굴한 감정 속에 빠뜨리고 또 나를 없다고 속이면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참괴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일찍이 우리 가문이 허락지 않던

비굴을 범하게게끔 한 죄과에 그들의 얼굴을 쳐다볼수가 없었다.

나병치료제를 쓰지 못해 궤양은 요원의 불같이 마구 퍼져 나갔다.

전신에 배와 사타구니만 남겨 놓고 모조리 궤양투성이가 되었다.

이 궤양에서 고름이 샘물 같이 흘러나오고 고름과 살이 썪는 냄새가 지독하였다.

오뉴월 고기 썪는 냄새는 그 유가 아니었다.

이 악취를 없애려고 크레졸 소독수로 방안을 딲았다.

그러나 악취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소독수로 방안을 딲으면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무슨 병자가 생겼느냐고 물어 보아서

이것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그래서 소독수는 삼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방안에다 마구 향수를 뿌리고 분향(焚香 )을 했다.

산사람 방에 븐향을 하다니 원통한 일이었다.

하기사 문둥이는 산송장이니 그럴 법도 하나 너무나 원통한 일이었다.

온 전신이 궤양 투성이니 옷도 입을 수가 없었다.

전신을 붕대로 감아도 고름과 진물이 나와 붕대나 옷에 마구 베어 드는 것이다.

온 몸뚱아리에 붕대를 감는다는 것은 여간한 일이 아니었다.

이 당시 태평양 전쟁은 점점 일본에게 불리해져 가고 있었서 고약이나 붕대니

탈지면이니 하는 위생재료는 좀처럼 구하기 어려웠다.

이런 것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물자란 물자는 모조리 결핍되고

무엇이든지 없는 세상이었다.

어지간한 약방이 문을 닫은 것은 벌써 예전의 일이었다.

병의 근원을 치료하지 못하고 팔다리 같이 썪어가는 몸뚱아리 대부분에 다만

교약치료를 한댔자 낫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썩;어가는 팔다리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찌나 썩는 것이 심했든지 다리의 정강이뼈가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문둥병 보다도 다른 객병이 내 몸을 죽음으로 앗아갈 것 같은 촉박감과

오한과 두통이 오실오실 내 몸을 떨게 하여 참다 못해서 이빨을

뽀도독 가는 것이었다.

솟아오른 민족감정

태평양 전쟁은 점점 그 진화가 일본 본토로 옮겨지는 것이 신문지상에 보도 되었다.

그러던 중 내가 애독하는 아사히 신문은 청천벽력 같이 제삼독일제국의 항복을

보도 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피에 살자는 독일민족자체를 근거로 하는 제삼국을 건설한

히틀러가 패망하였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몸은 병들었을망정 정신은 올바르게 지향발전하여야 하겠다고 미음먹었다.

나는 인간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전 목표를 두고 인간의 악적 요소를

도태제거(陶汰除去) 하면서 민족을 우수하게 우생개선(憂生改善) 하려는 사람이 ,

또 자기 나라 민족을 생산한 민족으로 개선창조하는 지도자가 정말로

이십세기의 지도자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이런 사람이 악으로 타락하여가는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자라고 생각하였다.

이 인류의 숙제를 올바르게 해결하는 사람이 인류에 대한 공헌이 있는

위대한 지도자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민족과 인류에게 가장 공헌이 있는 사람을

아직도 나는 보지 못했다.

내가 학생시대를 통하여 민족주의를 신봉하게 된 때는 소위 내선공학(內鮮共學)

을 한다는 미명을 내세운 이리 농림학교시대부터였다.

일본인 선생에게, 일본인 학생에게 굴욕을 당해가면서 공부하던 소년시대의

이가 시리던 일, 또 일본에 가서 일본사람한테서 [요보]라 불리우고

또 우리들 자신이 엽전이라고 부르던 생각.

또 우리 땅에서 삼천만 동포가 멸시 당하던 일, 같은 사람이면서 나라없는 사람은

가치가 없다는 슬픈 감정.......

지금 그 차위(差位)를 비유로 말하자면 성한 사람과 문둥이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생각할 수가 있다.

여기서 나는 히틀러의 마인갑(나의 투쟁)을 애독하면서 민족주의를

신봉하고 내딴에는 좀 의지 있는 줏대를 세우면서 살아 왔었다.

마인갑 중의 민족을 개량하는 곳만 발취하였다.

심취한 나머지 이리농림학교 시대에 학생들과 싸우는 데는 제일 선봉이 되었다.

아! 약, 약, 약을!

그리하여 일본인 선생이나 학생들에게서나 요주의의 존재가 되었으며

경원하는 존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의지는 나의 청춘을 일관하여 조그만한 투쟁을 계속하게 하였다.

그 후에 경기도에 근무하였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도지사였던 스즈기가 나보고 하이칼라 머리를 삭발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경기도의 각 시군면의 직원의 직원은 나를 빼고는 모조리 삭발하였다.

끝끝내 나는 삭발하지 않고 조그마한 저항을 계속하여 왔었다.

나는 민족문제를 항상 생각하여 보았다.

그리하여 민족적인 순수한 생활감정을 가장 존중히 생각하였다.

나는 생각하건데 그 나라의 올바른 사람이 되려면 자기가 민족을 통과하고

또 민족생활감정을 체험하고 민족의 궁경(窮境)을 응시하면서 민족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여야 한다고 단정하였다.

또 국가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 민족의 예술가로서 자처하려는 사람들은

적어도 민족적인 것을 표현하여야 할 임무가 있다고 믿고

민족과 국민과 고향과 향토를 꾸준히 공부했다.

이 세상은 언제나 야욕에 가득찬 민족집단에게서 구박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앞이 어두워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좋든 그르든 남의 나라의전통과 정신을 무시하고 자기네의 일방적

조작을 옳다고 강요하든지 또는 남의 것을 말살시키는 따위의 것에 대하여

나는 언제나 반감과 불평을 가졌다.

‘야! 야! 문둥이 네 주제에 무슨 기염이며 흥분이냐’할 것이지만

이것은 여태껏 내가 살아온 환경, 즉 이런 문제를 무관심하게 살 수 없게

한 환경이 가르친 것이 아닌가 한다.

태평양전쟁은 점점 심각하고 전화는 일본 본토로 옮겨지고 있었다.

약국이란 약국에 약이 없어진 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이었다.

나병치료제를 구독하려고 아버지는 여러 도시를 샅샅이 찾아다니면서

약방, 병원 등등을 모조리 찾았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다.

늘어만 가는 궤양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일본 대판에 있는 두 군데 제조본포(製造本鋪)에

전보로 주문하였더니 원료수입불능과 촉매제 품절로 없다는 회전이 왔다.

할수없이 대판에 있는 다가기 제약소에서 제조하는 히도노꼬르를

삼백원어치 주문하였다.

온 몸뚱아리가 궤양투성인데 약방에는 치료를 할 붕산연고도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상처를 소독할 옥시풀이라든지 리조-루 석탄산, 승홍 같은 것도 없었다.

이쯤 되고 보니 붕대도 없고 가제나 탈지면도 없어 나는 점점 운명이 나를 버린다는 기분에

마치 기암절벽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살자고 무슨 나무나 풀뿌리라도 쥐어보겠다는

심경에서 무엇이든지 목숨을 이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붙잡으려고 하다가

붙잡지 못하고 떨어져 죽어가는 절망과 같이 앞이 깜깜한 공포감에 휩싸였다.

나에게 있는 한도 이상의 지혜를 짜보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불같이 머리에 가슴에 타올랐다.

그리하여 궤양의 치료제로써 단연고의 대용으로 하지감자를 쪄서

이것을 절구에다 다듬어 돌에다 인절미 떡을 치듯이 쳐서 단연고 같이

만들고 여기에다 붕산말과 머큐롬을 섞고 그 다음에 콩기름을 넣고

잘 섞고 비벼서 고약 같이 만들었다.

탈지면이 없는 것은 차치하고 솜조차도 돈 주고 사려도 살 수 없는 데는

하는 수가 없었다.

전쟁으로 그 흔하던 물자가 무엇이든지 없어지고 무슨 물건이든지

보고 죽자고 해도 없는 일분의 패진의 궁상은 날로 심해졌다.

궤양이 온 전신에 만신창이 되어 하나하나를 치료한다는 것은 도저히

못할 일이며 신경이 짜려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온 몸뚱아리에서 흉부와 복부, 그리고 인류의 영원한 영천부인 P부를 빼놓고는

전부가 궤양이다.

하루는 얼마나 되는가 궤양을 헤어보았다.

적어도 850군데에서 900군데나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퍼져 있는 것이다.

(당시부터 십여 년 후 나는 내가 살고있는 인천시 간석동의 상애원의 육백환자

중에서 나 같이 험한 궤양이 많은 환자는 하나도 볼수없었다.)

마치 밤하늘에 별이 무수하게 뿌려져 있는 것 같이 나의 온 몸뚱이에는

궤양이 뿌려져 있었다.

궤양이 어떻게도 많은지 치료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가제니, 붕대니 하는 것도 없어서 낡은 광목 헝겊에다 하지감자로 만든

고약을 발라가지고 환부에다 각반을 치듯이 몸뚱이를 감아버렸다.

아듀! 한태영

또 소독수가 없었다.

수돗물에다 소금을 약 1%타서 소독수 대용으로 환부를 깨끗이 씻어낸 후

고약각반을 쳤다.

날마다 이것을 되풀이 한다는 것도 정말 싫고 짜증나는 일이었다.

날마다 날마다 이렇게 치료를 하는 데에 적어도

낡은 광목천이라 하더라도 3마 정도는 드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낡은 천이라 하여도 한도가 있는 것이어서

집에 있는 천을 모조리 써버리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바지, 저고리, 치마, 또는 침구의 호청까지도

아까운 것이 없이 찢어서 가제난 붕대의 대용으로 써버리는 것이었다.

나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만창이 된

궤양을 막는다는 고식적인 고약치료 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겨우 어쩔수없이 임시변통으로 하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자꾸만 내 몸은 그칠 줄 모르고 썩어가는 것이었다.

지금 나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이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이 하늘 아래에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내게 운명의 신에게서 정말로 버림받고 절망의 심연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이 시간이 한초 한초 경과한다는 것은 사형의 고통을

더욱 심각하게 인식하는 것밖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내 정신은 점점 죄어드는 것이었다.

절망에 파묻혀 허탈한 백치가 되었다.

나는 죽음이라도 오려면 오라 하면서 삶이든지 죽음이든지

아무렇게나 되어도 아무 두려움 없는 무딘 신경이 나를 허심없이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선조들이 아들이라고 기뻐하시면서 지어주신

나의 이름을 불러본다.

한태영이라는 나의 이름, 또 이름과 함께 부르던 나의 혼백과

육체를 아주 이 세상에서 영결시키고 이 세상에서 영영

없애버려야 하겠다는 결심이 치솟는 것이다.

오오, 나의 이름이여.

도포 입은 할배들이 긴 담뱃대에 새로운 후계자의 영화를 꿈꾸며

희망을 걸어본 이름이여!

장손인 나의 명을 축복하시며 만수무강을 빌었던가.

그렇지 않으면 억만장장 도주공을 빌었던가.

그러한 장손이 이제 이름과는 어긋난 문둥이가 되고보니

이제 이름과 현실의 아이러니를 어찌할 것이냐.

[공유] 한하운(1920~1975) 네이버 카페 (2025)
Top Articles
Latest Posts
Recommended Articles
Article information

Author: Allyn Kozey

Last Updated:

Views: 5989

Rating: 4.2 / 5 (43 voted)

Reviews: 90% of readers found this page helpful

Author information

Name: Allyn Kozey

Birthday: 1993-12-21

Address: Suite 454 40343 Larson Union, Port Melia, TX 16164

Phone: +2456904400762

Job: Investor Administrator

Hobby: Sketching, Puzzles, Pet, Mountaineering, Skydiving, Dowsing, Sports

Introduction: My name is Allyn Kozey, I am a outstanding, colorful, adventurous, encouraging, zealous, tender, helpful person who loves writing and wants to share my knowledge and understanding with you.